“그럼 내가 백월인이라는 것도 알고 있겠네?”

 

 제가 이 동아리실을 찾아오게 된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해요선배가 백월인이라는 사실은.”

 

 입단 동기가 단지 그것뿐인 건가이 녀석머릿속에 맴돌던 의문점은 이내 입을 통해 그 모습을 드러냈다.

 

 단지 그것뿐인 거냐이 동아리에 찾아오게 된 계기가.”

 

 애라하라고 이름을 밝힌 1살 연하의 신입생은 내 질문을 듣더니 아기는 어떻게 생기냐는 10살짜리 동네 꼬맹이의 질문으로 인해 어쩔 줄 몰라 하며 얼굴을 붉히는 옆집 누나와 같은 표정으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이유 중 하나라고 했지 단지 그 이유뿐이라는 말은 안 했던 것 같은데요.”

 

 그랬던가.

 

 이 녀석이 그런 말을 했었나 골똘히 생각하던 나는 결국 답을 찾지 못한 채 팔아치웠던 정신을 동아리실에 도로 환불하였고 곧이어 내가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사이 대화가 단절되었다는 걸 인지하게 되었다단절된 대화를 어떻게든 다시 이어보기 위해 토크 주제를 선별하는 사이 말을 거는 법을 모르는 것만 같았던 애라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선배세계 해군 칼럼 쓰시죠그것도 제가 여기에 온 이유 중 하나예요.”

 

 그럼 해군에 대해 관심이 있다는 건가?”

 

 .”

 

 관심이 있긴 하구나이 녀석.

 

 그래서 말인데 선배랑 한번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어요.”

 

 그리하여 나와 새로운 부원인 애라하는 이곳 네이비 동아리실에 앉아 처음으로 본래 동아리실을 설립한 취지에 걸맞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지극히 네이비다운 활동이긴 했지만 왠지 마음 한구석이 황량해지는 것을 느꼈다이성과 단둘이 같은 방에서 이런 이야기나 나누고 있다니하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나쁘기만 한 건 아니었다.

 

 애라하는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굉장히 박식한 아이였다각국의 해군력에 대한 통계는 물론이고 각국 해군의 역사국제정세까지 정말 모르는 게 없었다내가 한 수 위일 거란 생각에 녀석을 살짝 얕잡아보고 대화를 시작했었지만 계속해서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오히려 내가 모르는 것들까지도 그녀는 알고 있었고 그것에 대해 나에게 설명하기까지 했다

 

 이거 왠지 대어를 낚은 느낌인 걸이 녀석만 있다면 동아리 폐부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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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세히 살펴보니 놀랍게도 이계의 문물이라 생각했던 것들은 백월의 언어와 같은 언어였다.

 

 백월의 운명을 짊어진 자여

 

 조국은 명한다.

 

 그대는 나를 도우라.’

 

 글귀를 읽는 순간 난 견딜 수 없을 만큼 강렬한 현기증을 느꼈다이내 다리가 풀려버린 난 그대로 주저앉아버렸다그러자 어느새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울어주고 싶었다대신해서조국을 대신해서 울어주고 싶었다울고 싶어도 울지 못하는 바보 같은 내 조국을 위해서대신 울어주고 싶었다아프다고너무나 아파서 미칠 것 같다고나 좀 도와달라고 소리쳐 외쳤지만 모두들 외면했다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누군가는 자신의 외침을 들어줄 것이라 믿었기 때문에그리고 결국엔 그 믿음이 이루어졌다바로 지금 이 순간 말이다.

 

 왜냐하면

 

 그 외침내가 접수했거든.”

 

 이제 외면하지 않을게그리고

 

 도와줄게내 숨이 멎는 날까지 널 위해 싸워줄게네가 더 이상 아파하지 않도록.”

 

 그날 나는 내 조국 백월과 약속했다아파하지 않을 때까지 싸워주겠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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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을 붙잡아두고 절대 놓아주지 않을 것만 같았던 매서운 겨울의 세력이 점차 누그러졌고땅 밑에 숨어 있던 가녀린 새싹들이 곳곳에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이 현상은 고스란히 내가 재학 중인 대명학원에서도 일어나고 있었다파릇파릇한 신입생들의 입학이 그것이다학원 곳곳에서는 신입생 유치에 혈안이 된 동아리들의 홍보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졌고그 모습을 본 나는 왠지 나도 이 일에 참여해야 할 것만 같다는 느낌이 들어 지금 이곳에 앉아 있다해군의 모든 것에 대해 자유로이 토론하는 곳네이비(Navy)의 동아리실이다처음 보는 사람은 심플하면서도 뭔가 있어 보이는 동아리명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실상 들여다보면 별거 아닌 동아리다부원이라곤 단장을 겸하고 있는 나 하나뿐이고동아리 활동이라고 해봤자 틈틈이 적고 있는 세계 각국의 해군에 대한 칼럼을 학교 신문에 기고하는 것뿐이다이 유일한 동아리 활동 덕분인지 다행히도 아직까지 폐부하라는 학생회의 명령이 떨어지지 않고 있다하지만 언제까지고 단장 겸 부원 한 명뿐인 동아리로 남아 있을 수만은 없었기에 동아리 홍보에 나서기로 결심했다그 노력의 일환으로 탄생한 것이 바로 이 홍보포스터이다이 또한 이름만 거창하지 구성이라곤 커다란 글씨로 쓴 동아리명에 주로 하는 활동동아리실의 위치단장인 내 이름이 다였고 제작자인 내가 봐도 민망할 정도로 초라했다하지만 더 이상 꾸미는 것도 귀찮았고그건 내 능력 밖이라는 생각이 들어 다른 동아리들이 포스터를 붙여놓은 게시판의 오른쪽 귀퉁이에 대충 붙여놓고는 하교했다.

 

 다음날수업을 모두 마치고 동아리실로 발걸음을 옮긴 나는 여느 때와 같이 동아리실에 앉아 칼럼을 쓰고 있었다백월의 속국이었다가 독립한 킨스로의 해군에 대한 칼럼이었다킨스로의 역사에 대해 간략히 서술한 뒤 본격적으로 해군력에 대한 글을 풀어나갈 무렵 신입생 한 명이 동아리실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실례합니다여기가 네이비 맞나요?”

 

 여성임을 나타내는 교복을 입고 있는 그녀는 문고리를 잡은 채 시선을 어디에 둘지 몰라 하며 나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잠시 멍해진 나는 질문에 답을 하는 것도 잊은 채 아직 길들지 않아 뻣뻣한 교복의 주인공인 신입생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등 언저리까지 내려오는 긴 생머리를 하고 있었는데 특이하게도 머리색이 파랬다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고민 중인 눈은 밤바다를 담아놓은 듯 머리색과 마찬가지로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구름 뒤에 숨은 태양 정도의 밝기를 가진 피부톤에 부끄럼을 많이 타는지 양 볼이 살짝 상기되어 연분홍빛을 발하고 있었다볼을 제외한 부분은 새하얬다.

 

 나도 모르게 감상을 하고 말았다젠장이러면 안 되지정신을 차린 나는 그녀가 처음 던졌던 질문에 대해 답해주었다.

 

 맞아.”

 

 그제야 그녀는 문고리를 잡고 있던 손을 뗐지만 그 행동을 끝으로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살아 있다는 증거를 보여주려는 듯 어깨가 들썩거리는 게 보였지만 계속 그러고만 있어서 난 의자를 꺼내 앉으라고 권해주었다의자에 앉은 그녀는 예의 숨쉬기 운동에 여념이 없었다입부를 희망하기는 하는 걸까이런 누추한 곳에 찾아오는 수고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말 없이 동아리실의 구조를 시신경으로 전달하는 일에만 전념-숨쉬기 운동을 포함한-하고 있는 그녀의 입에서 무슨 말이라도 나오지 않을까 기다리다 지친 나는 먼저 입을 열었다.

 

 여기가 뭐 하는 동아리인지는 아냐?”

 

 해군에 대해 자유로이 토론하는 곳 아닌가요?”

 

 잘 알고 있네.”

 

 부끄럼을 잘 타는 성격에 비해 말은 상당히 또박또박 잘하는 편이었다이렇게 말을 잘하면서 왜 지금까지 침묵일변으로 있었던 거냐그건 그렇고 슬슬 새 부원이 될지도 모르는 신입생의 프로필에 대해 물어볼까.

 

 우선 간단한 인적사항에 대해 물어보도록 할게이름이 뭐니?”

방금 전 질문에 대답할 때와는 달리 바로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뭐지이름이 촌스럽기라도 한가.

 

 애라하.”

 

 애라하상당히 독특한 이름이네어라?

 

 백월인이냐?”

 

 .”

 

 이름을 말할 때와는 다르게 힘이 실려 있는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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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이야기를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많이 고민했다어디서부터가 이 일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을까그런 고민 끝에 그녀와 처음 만났던 날부터 적기로 마음먹게 되었다.

 

 처음 만났을 때는 평범한 여고생다음번에 만났을 적엔 해군 장교그리고 마지막에 청월의 여황제가 된 그녀그 누구보다 오랜 시간 함께 지내왔다고 자부할 수 있지만 사실은 그녀의 본명조차 알지 못한다내가 아는 이름이라곤 그녀가 좋아했던 어느 지역의 강 이름뿐이다.

 

 애라하.

 

 더 이상 부를 수도볼 수도 없는 그 이름그 이름의 주인공과 함께한 나의 추억들을 지금부터 적어보려 한다추억 속에서만 부를 수 있고 볼 수 있는 그녀의 이야기를.

 

 

 

 

 

 

 

이건 정민 시점의 프롤로그 맨 처음 올린 건 애라하 시점의 프롤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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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정민 중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의 아버지 손정도 백작은 끝까지 여기에 남겠다고 했다둘이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에도 야마토의 전차들은 쉬지 않고 불꽃을 내뿜고 있었다저택의 입구인 현관문이 있던 자리엔 커다란 파공이 나 있었고 그 너머로 야마토군의 병사들이 보였다하지만 그들은 전차 옆에 붙어 앞으로 나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아무래도 저들은 우리를 생포할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저택과 함께그리고 물속으로 항해하는 배와 함께 묻어버릴 생각인가보다.

 

 정말로 안 가실 겁니까?”

 

 재차 물어보는 손 중위.

 

 누군가는 남아서 이 배가 출항할 수 있게 해야 한다그러려면 배에 대해 알고 있는 내가 남아야만 해얘야난 걱정 말거라저 녀석들은 여러모로 내가 필요할 것이니 죽이지는 않을 거야하지만 넌 지명수배자나 다름없는 몸이지 않느냐날 걱정할 시간이 있으면 네 몸이나 더 생각하거라.”

 

 그렇게 말한 손정도 백작의 손에 떠밀려 억지로 배에 올라탄 우리들그 와중에도 포격은 계속되었다.

 

 이걸 가지고 가거라.”

 

 손정도 백작은 손 중위에게 작은 책자 하나를 손에 쥐어주었다.

 

 이 배의 설계도와 조종법을 적어놓은 설명서란다그리고 거기 적혀 있는 좌표대로 항해하면 본국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게다.”

 

 손 중위는 고개를 떨군 채 손에 쥔 책자를 바라보며 바르르 떨었다이내 무슨 할 말이 떠올랐는지 고개를 들어 아버지인 손정도 백작을 바라보았다.

 

 …….”

 

 가라.”

 

 그 말만 남긴 채 손정도 백작은 헤치를 닫았다그와 동시에 폭음이 들렸고 배가 심하게 흔들렸다배는 그러한 흔들림에 아랑곳하지 않고 순조로히 물속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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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론장에서 돌아오는 길우리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바로 내 앞에 어제의 주인공 애라하 대위가 잠들어 있다머리가 창문에 맞닿아 있어 계속해서 덜컹거린다이래선 뇌세포가 전멸하겠는걸창가 쪽으로 기울어진 머리를 조심스럽게 통로 쪽으로 옮겨놓았다그러자 이번엔 통로 쪽 좌석에 놓아두었던 여행용 가방에 머리를 부딪혔다꽤 아파보였는데도 용케 깨지 않는다그러게 제가 가방은 굳이 옆자리에 놓지 않아도 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예상 외로 무게가 나가는 가방을 낑낑대며 겨우 선반 위에 올려놓고 있는데 역무원 하나가 쪽지 하나를 건네주고 가버렸다.

 

 보름달이 뜨기 전에 한번 보고 싶구먼애라하 대위와 함께 와주었으면 하네.’

쪽지엔 이런 글이 적혀 있었다발신인은 누기지쪽지를 뒤집어보았다.

 

 ‘백월의 파수꾼

 

 황제폐하셨다.

    

 

 

  기차에서 내려 배로 갈아탄 뒤 백월의 항구 중 한 곳에 도착했다여독을 풀고자 근처 여관에 방을 잡았다여장을 다 풀고 보니 이미 시각은 한밤중이었다여관 주인이 푸짐하진 않지만 정갈하게 차린 밥상을 들여왔다나와 애라하 대위는 서로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인간이 생활을 영위해나가는 데 있어 필요한 세 가지 기본요소 의식주 중 식을 충실히 해나갔다.

 

 목이 너무 뻐근해.”

 

 먼저 적막을 깬 건 애라하 대위였다.

 

 말을 많이 하는 것만으로도 목이 뻐근할 수 있는 거야?”

 

 보통은 그렇지 않죠.”

 

 목이 안 뻐근한 게 이상한 겁니다그 각도로 꺾였는데.

 

 그러고 보니 오늘 기차 안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 안 해줬다.

 

 애라하 대위님황제폐하께서 우리를 보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난 애라하 대위에게 역무원에게서 받은 쪽지를 건네주었다그러자 그녀는 고개를 오른쪽으로 꺾더니만 이상한 신음소리를 냈다그리고 이내 표정이 우스꽝스럽게 변하더니 곧이어 진지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이걸 왜 이제 보여주는 거야?”

 

 목소리에도 온도가 있다면 방금 그 목소리는 필히 영하의 온도였을 거다까먹고 있었다고 솔직히 말하면 화내겠지?

 

 피곤해보이셔서 나중에 보여드리려 했는데 그게 지금이었을 뿐입니다.”

 

 우윽.”

 

 고개가 오른쪽으로 꺾인 채 담이 찾아온 애라하 대위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 모습이 애처로웠던 나는 목마사지를 해주려 했으나 살짝만 힘을 주어도 고통스러워해서 그만뒀다방금 그 영하권의 목소리는 이것 때문이었던 것 같다.

 

 식사를 끝마친 우리는 보름달이 뜨기 전까지 수도에 당도하려면 남은 시간이 그리 넉넉하지만은 않았기에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하기로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손 중위나 머리에 혹도 난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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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은 국제 연합의 장 행사가 열리는 날이다그와 더불어 백월의 독립에 대한 토론이 있을 예정이다원래 토론에는 장관급의 인사가 참여해야 하나 무슨 이유에선지 황제폐하께서 애라하 대위를 보내겠다고 하여 지금 나와 애라하 대위는 이곳에 오게 되었다.

 

 각 나라 대표들이 자리한 오찬장에서 나와 애라하는 한쪽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애라하 대위는 음식엔 손도 대지 않은 채 두리번거렸다난 입 안의 고기 한 점을 분쇄시키며 애라하 대위에게 말을 걸었다.

 

 안 먹고 뭐 하십니까음식 식습니다.”

 

 애라하 대위는 예의 행동을 그치지 않은 채 입만 움직여 대답했다.

 

 야마토의 대표 녀석을 찾고 있어찾았다.”

 

 애라하 대위는 손끝으로 야마토의 대표 녀석을 가리켰다하지만 이내 손을 내려버려 누가 대표 녀석인지 보지 못했다아마도 주변의 시선을 의식해서인가보다.

 

 이번 토론에 있어서 최대의 적이야.”

 

 애라하 대위는 그제서야 접시에 담긴 미트볼을 하나 집어 입에 넣었다.

 

 절대로 져선 안 돼반드시 독립을 받아내고야 말겠어.”

 

 접시에 담긴 음식들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그녀는 일종의 자기암시를 했다.

    

 

 

  오찬이 끝나고 토론장에 들어갔다가운데엔 서기 두 명이 낮은 칸막이를 사이에 두고 마주앉아 토론 내용을 받아 적을 준비를 하고 있었고 그 주위로 둥글게 각 나라 대표들이 자리했다야마토는 백월의 맞은편에 자리 잡고 있었다백월 측에 있는 애라하를 보았다그녀는 귀에 이어폰을 꽂은 채 계속해서 무언가 적고 있었다뭘 적고 있는 거지.

 

 애라하 대위가 계속해서 무언가 써내려가는 도중 토론의장이 토론 개최를 선언했다그러자 고개를 처박고 있던 그녀는 미어캣마냥 재빠르게 고개를 들더니 귀빈석에 앉아 있던 나와 눈을 마주쳤다보아하니 많이 긴장한 모양이다난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미소를 지어주었고 그게 효과가 있었는지 긴장한 표정이었던 그녀도 나에게 미소를 지어보였다그리고 이내 앞을 보고 앉아 토론 준비를 했다.

 

 토론은 각 대표들이 돌아가면서 한 가지씩 토론 주제를 던지면 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방식이었다행사의 주제가 국제 연합인 만큼 토론들의 주제 또한 그에 걸맞은 내용들이 많았다그러나 의외인 점도 있었다야마토의 토론 주제가 백월과 무관한 내용이었다는 것백월뿐만이 아닌 다른 식민지 국가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았다이것은 다른 나라들도 마찬가지였다어느 나라도 야마토에 대해 비판하려 들지 않았다그들의 만행에도 불구하고심지어 야마토의 식민 지배를 받고 있는 나라들마저 언급을 피했다타국을 힘으로 제압해 식민 지배를 하는 것은 분명 잘못된 행동이다그리고 그 행위를 야마토는 하고 있다하지만 그 행동에 대한 잘못을 지적하는 이가 단 한 명도 없다단 한 명도.

 

 혼자 푸념하는 사이 어느새 백월의 차례가 되었다토론의 주제는.

 

 백월을 비롯한 피식민국들의 독립입니다.”

 

 그러자 토론장이 술렁이기 시작했다귀빈석에 앉아 있던 나도 조금 당황했다원래 백월의 독립에 관한 것만 준비해왔던 걸로 기억하는데……아마도 방금 쓰던 게 그것이었나 보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지?

 

 애라하 대위는 야마토의 대표를 똑바로 쳐다보며 자신이 제시한 토론 주제를 착실히 발표해나갔다점점 분위기가 고조되어가는 가운데 야마토의 대표는 연신 하품을 해대며 듣는 둥 마는 둥 하더니 이내 귀에 꽂은 이어폰을 빼버렸다이는 더 이상 이야기를 듣지 않겠다는 소리다하지만 의장은 이를 제지하기는커녕 아직 애라하 대위가 발표할 시간이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다음 주제로 넘기려 했다.

 

 .

 

 그 순간 갑자기 애라하가 책상을 내려치면서 일어났다그녀는 이어폰을 뽑더니 야마토어로 말을 이어나갔다.

 

 우리가 언제까지고 당신네들이 행하는 짓거리들을 보고만 있을 줄 아나본데이거 하나만 기억해둬당신네가 앗아간 모든 것들.”

 

 애라하 대위는 오른손을 들더니 손가락 두 개를 펴보였다.

 

 두 배로 갚아주겠어.”

 

 야마토의 대표는 기세에 눌리지 않고 예의 거만함을 유지한 채 대답했다.

 

 그럴 능력이 있다면 그렇게 해독립힘을 키운 다음에나 그런 소릴 하시지너희가 우리를 이길 수 있다면 얼마든지 시켜줄게독립인지 뭔지를 말이야.”

 

 곧이어 평생 잊지 못할 말을 듣게 되었다.

 

 그 말접수했어.”

 

 어느새 오른손은 검지를 제외한 손가락들이 모두 접히고 그 끝은 야마토의 대표를 향하고 있었다.

 

 삐이-

 

 발표시간이 끝난 애라하 대위는 언제 그랬냐는 듯 자기 자리에 앉았다맞은편에 앉아 있던 야마토의 대표는 애라하의 거만한 태도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표정이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하지만 애라하는 그렇지 않았는지 나를 향해 끝내주는 미소를 날려주었다.

 

 잘하셨습니다애라하 대위님.

    

 

 

  훗날 이 토론은 전후 영토 협정 때 피식민국가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하였고 야마토의 발언으로 인해 모든 피식민국가가 독립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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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머리카락이 시퍼렇게 물든 계집아이가 태어났다그렇담 이 아이도 한평생을 바다만 바라보며 살아가려나어두운 밤바다 위에 떠 있는 저 달처럼.

 

 靑月너의 운명과 닮은 이름이로구나내 아버지가 그러했듯이 너 또한 밤하늘의 저 푸른 달을 바라보며 사랑하는 이들과 힘없는 조국을 떠올리겠지.

 

 내 딸아저 넓은 바다를 너의 가슴 속에 담거라저 바다에 이 나라 이 민족의 자유와 해방이 있다너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바다로 나아가거라.

 

 내 아버지가 그랬고내 아버지의 아버지가 그러했듯이 너는 바다로 나아가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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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로 건설할 항구에 관한 일로 백월의 꼭두각시들과 회의를 가졌다사실 회의랄 것도 없었다우리가 요구를 하면 그들은 즉각 들어주었고우리는 그들에게 그에 걸맞은 돈을 쥐어주면 그만이었다.

 

  백월의 꼭두각시들이 대접한 술자리에서 얼큰히 취한 나는 집으로 가는 차에 올라탔다내가 가는 이 여정의 목적지엔 사랑하는 내 아내와 딸이 기다리고 있겠지집에 가는 길에 딸애가 예전부터 사달라고 졸랐던 커다란 곰 인형을 샀다딸애만한 크기의 인형이었다그 아이가 좋아해하는 표정을 생각하니 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딸아이를 생각하다보니 어느새 집 앞에 도착했다차에서 내려 대문에 달린 초인종을 눌렀다이상하게도 한참이 지나도록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다시 초인종을 눌러보았지만 마찬가지였다그리 깊은 밤은 아니었다원래 아내는 늦게 자는 편이라 자정이 다 되어서야 잠자리에 든다그리고 굳이 아내가 아니어도 하인들이 있을 텐데 아무 반응이 없었다갑자기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기사에게 차고에 있는 총을 들고 오라 하고 난 비상키를 사용해 대문을 열고 들어갔다집안에 불은 다 켜져 있었다현관문에 달린 손잡이를 잡고 돌렸다.

 

 손잡이는 누군가 부순 흔적이 남아 있었다.

 

 힘없이 열린 현관문 너머엔 피로 흥건히 적셔진 고깃덩어리들이 마구잡이로 널브러져 있었다그 고깃덩어리들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 집에 속해 있던 하인들이었다.

 

 그럼 내 아내와 내 딸아이는설마.

 

 순간적으로 불길한 예감이 뇌리를 스쳤고 그 생각을 떨치기 위해서인지 나도 모르는 새 손에 쥐고 있던 곰 인형을 꽉 쥐어짰다그리고 그와 동시에 곰 인형에서 반짝이는 물체가 튀어나왔다아주 예리하게 생긴 물체였다.

 

 칼날이었다.

 

 칼날은 반 바퀴 회전했다그러면서 곰 인형 안에 있는 솜을 휘저었다아마 내 속도 저렇게 되었겠지의외로 내 감정은 무덤덤했다너무 갑작스럽게 찾아온 죽음이라 그런가드는 생각은 딱 두 가지 질문뿐이었다내 몸에 칼을 쑤셔 넣은 등 뒤의 존재에게 할 질문들아무 말이 없었기에 먼저 말을 걸었다.

 

 …… 왜 나를 찌른 것이냐…….”

 

 그러자 등 뒤에서 사내로 추정되는 목소리가 잔잔히 흘러나왔다.

 

 백월은.”

 

 칼날은 다시 회전했다.

 

 네놈을 원치 않는다.”

 

 입에서 피가 왈칵 쏟아져 나왔다쏟아진 피는 배가 터진 곰 인형 위로 떨어지며 인형을 적셔갔다.

 

 그럼…… 내 아내와…… 딸아이는…….”

 

 등 뒤의 사내는 칼날을 빼내고 나를 가볍게 밀어 쓰러뜨렸다피로 물든 곰 인형은 내 몸에 깔린 채 계속해서 피로 물들어

갔다총을 찾으러 갔던 기사의 시체가 눈에 들어왔다.

 

 원치 않는다.”

 

 시야는 점점 흐려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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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월의 전통놀이총과 흡사한 모양으로 깎은 나무에 고무줄을 걸고 방아쇠를 달아 쏠 수 있게 한 고무줄 총을 가지고 노는 놀이다놀이를 하는 아이들은 서로 패를 나누고 싸움을 벌여 우열을 가린다이 놀이는 처음에 나라에서 권장했던 놀이였다.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시기에 백월의 조정은 전쟁 중 일어난 의병들의 전투력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뛰어났던 것을 보고 유사시에 다시 이러한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정기적으로 훈련을 시켰다그러나 바쁜 생활 와중에 중간중간 훈련까지 해야 하는 번거로움 때문에 백성들 사이에서 불평불만이 터져나왔다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놀이였다자발적으로 참여하면서도 전투력을 높이는 효과를 꾀할 수 있는 아주 적절한 방안이었다여기에 문제가 되는 것은 놀이에 필요한 도구들이었다칼이나 창 같은 것들은 나무를 깎아서 만들면 그만이었지만 총은 그렇지 못했다당시 신진문물이었던 총은 주력무기로 급부상하였지만 쉽사리 본떠 만들기도 어렵거니와 값비싼 화약이 필요했으며 탄의 속도를 놀이의 취지에 걸맞은 힘으로 조절해 발사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이에 고민하던 백월의 조정은 파해법을 찾기 위해 해외로 눈을 돌렸다그리고 멀리 갈 필요도 없이 백월의 속국이었던 하동난국에서 해답을 얻었다하동난국은 열대 기후에 속하는 나라로 특산품 중 고무가 가장 유명한 나라였다이 고무는 속국이었던 하동난국에서 백월에 진상하던 특산품이었는데 수요가 적어 백월에선 더 이상 받지 않는 상품이었다그러던 어느 날 창고에 처박혀 썩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고무를 한 관리가 발견하게 되고 이를 유심히 관찰한 그 관리는 고무를 이용해 고무줄을 만들고 그것을 장전할 고무줄 총을 만든다그는 즉시 조정에 자신이 만든 장난감을 보여주었고 조정에선 이를 채택해 대량으로 양산하였고 백성들에게 보급하여 폭력적이지만 폭력적이지 않은 총싸움을 널리 퍼뜨렸다.

 

 정민은 어렸을 적 총싸움을 굉장히 잘했다아버지가 만들어준 강력한 고무줄 총도 한 몫을 한 건 있지만 정민의 실력이 뛰어난 게 더 컸다그래서 한때 동네 아이들이 정민을 왕따 시켰던 적도 있었다.

 

 나중에 정민은 발군의 사격솜씨로 애라하와 적군에게 포위당했을 때 무사히 빠져나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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