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을 붙잡아두고 절대 놓아주지 않을 것만 같았던 매서운 겨울의 세력이 점차 누그러졌고, 땅 밑에 숨어 있던 가녀린 새싹들이 곳곳에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이 현상은 고스란히 내가 재학 중인 대명학원에서도 일어나고 있었다. 파릇파릇한 신입생들의 입학이 그것이다. 학원 곳곳에서는 신입생 유치에 혈안이 된 동아리들의 홍보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졌고, 그 모습을 본 나는 왠지 나도 이 일에 참여해야 할 것만 같다는 느낌이 들어 지금 이곳에 앉아 있다. 해군의 모든 것에 대해 자유로이 토론하는 곳. 네이비(Navy)의 동아리실이다. 처음 보는 사람은 심플하면서도 뭔가 있어 보이는 동아리명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실상 들여다보면 별거 아닌 동아리다. 부원이라곤 단장을 겸하고 있는 나 하나뿐이고, 동아리 활동이라고 해봤자 틈틈이 적고 있는 세계 각국의 해군에 대한 칼럼을 학교 신문에 기고하는 것뿐이다. 이 유일한 동아리 활동 덕분인지 다행히도 아직까지 폐부하라는 학생회의 명령이 떨어지지 않고 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단장 겸 부원 한 명뿐인 동아리로 남아 있을 수만은 없었기에 동아리 홍보에 나서기로 결심했다. 그 노력의 일환으로 탄생한 것이 바로 이 홍보포스터이다. 이 또한 이름만 거창하지 구성이라곤 커다란 글씨로 쓴 동아리명에 주로 하는 활동, 동아리실의 위치, 단장인 내 이름이 다였고 제작자인 내가 봐도 민망할 정도로 초라했다. 하지만 더 이상 꾸미는 것도 귀찮았고, 그건 내 능력 밖이라는 생각이 들어 다른 동아리들이 포스터를 붙여놓은 게시판의 오른쪽 귀퉁이에 대충 붙여놓고는 하교했다.
다음날. 수업을 모두 마치고 동아리실로 발걸음을 옮긴 나는 여느 때와 같이 동아리실에 앉아 칼럼을 쓰고 있었다. 백월의 속국이었다가 독립한 킨스로의 해군에 대한 칼럼이었다. 킨스로의 역사에 대해 간략히 서술한 뒤 본격적으로 해군력에 대한 글을 풀어나갈 무렵 신입생 한 명이 동아리실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실례합니다. 여기가 네이비 맞나요?”
여성임을 나타내는 교복을 입고 있는 그녀는 문고리를 잡은 채 시선을 어디에 둘지 몰라 하며 나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잠시 멍해진 나는 질문에 답을 하는 것도 잊은 채 아직 길들지 않아 뻣뻣한 교복의 주인공인 신입생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등 언저리까지 내려오는 긴 생머리를 하고 있었는데 특이하게도 머리색이 파랬다.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고민 중인 눈은 밤바다를 담아놓은 듯 머리색과 마찬가지로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구름 뒤에 숨은 태양 정도의 밝기를 가진 피부톤에 부끄럼을 많이 타는지 양 볼이 살짝 상기되어 연분홍빛을 발하고 있었다. 볼을 제외한 부분은 새하얬다.
나도 모르게 감상을 하고 말았다. 젠장, 이러면 안 되지. 정신을 차린 나는 그녀가 처음 던졌던 질문에 대해 답해주었다.
“맞아.”
그제야 그녀는 문고리를 잡고 있던 손을 뗐지만 그 행동을 끝으로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살아 있다는 증거를 보여주려는 듯 어깨가 들썩거리는 게 보였지만 계속 그러고만 있어서 난 의자를 꺼내 앉으라고 권해주었다. 의자에 앉은 그녀는 예의 숨쉬기 운동에 여념이 없었다. 입부를 희망하기는 하는 걸까? 이런 누추한 곳에 찾아오는 수고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말 없이 동아리실의 구조를 시신경으로 전달하는 일에만 전념-숨쉬기 운동을 포함한-하고 있는 그녀의 입에서 무슨 말이라도 나오지 않을까 기다리다 지친 나는 먼저 입을 열었다.
“너, 여기가 뭐 하는 동아리인지는 아냐?”
“해군에 대해 자유로이 토론하는 곳 아닌가요?”
“잘 알고 있네.”
부끄럼을 잘 타는 성격에 비해 말은 상당히 또박또박 잘하는 편이었다. 이렇게 말을 잘하면서 왜 지금까지 침묵일변으로 있었던 거냐. 그건 그렇고 슬슬 새 부원이 될지도 모르는 신입생의 프로필에 대해 물어볼까.
“우선 간단한 인적사항에 대해 물어보도록 할게. 이름이 뭐니?”
방금 전 질문에 대답할 때와는 달리 바로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뭐지? 이름이 촌스럽기라도 한가.
“…애라하.”
애라하? 상당히 독특한 이름이네. …어라?
“너, 백월인이냐?”
“네.”
이름을 말할 때와는 다르게 힘이 실려 있는 목소리였다.